1980년대 후반
언 손을 녹이던 그 밤의 짬밥
별빛만 얼어붙은 전방 초소의 긴 밤과, 교대 뒤에 받아 든 식판의 뜨거운 국물 한 숟갈. 1980년대 후반 전방 부대의 겨울입니다.
공개일

장면 · 초소
자정을 넘긴 전방 초소의 밤은 유난히 길었다. 별빛만 시퍼렇게 얼어붙은 하늘 아래, 철모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살을 에듯 매웠다. 발을 굴러도 발가락은 남의 것처럼 감각이 없었고, 입김은 나오는 족족 눈썹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들리는 것이라곤 마른 나뭇가지가 얼어 갈라지는 소리뿐인 적막 속에서, 초병들은 서로의 숨소리에 기대어 밤을 견뎠다.
장면 · 교대
바람 소리 사이로 눈 밟는 소리가 저벅저벅 다가오면, 언 몸이 먼저 알고 곧추섰다. 어둠을 향해 낮게 던지는 수하, 되돌아오는 익숙한 목소리. 다가온 교대자의 철모 위에도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인계 사항 몇 마디를 주고받고 초소를 넘기면, 내려가는 언덕길의 다리는 제 것이 아닌 듯 뻣뻣했다. 그래도 몇 걸음 가다 등 뒤에 남은 전우를 한 번 돌아보게 되는 것이, 그 길의 오랜 버릇이었다.
교대를 마치고 내려오면 취사장에서 새어 나오는 김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언 손을 호호 불며 받아 든 식판, 뜨거운 국물 한 숟갈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 얼었던 몸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풀렸다. 반찬이 대단할 것도 없는 짬밥이 왜 그리 꿀맛이었는지, 곱은 손가락이 젓가락을 겨우 쥐고도 밥알 하나 흘리기 아까웠다.
"국물부터 마셔라. 속부터 녹여야 한다." — 언 손으로 식판을 받아 든 신병에게, 고참들은 제 몫의 국물을 덜어 주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매운 추위를 버티게 한 것은 두꺼운 파카가 아니라 곁에 선 전우의 어깨였다. 말없이 장갑을 벗어 건네주던 손, 먼저 국물을 떠서 밀어주던 마음. 겨울이 아무리 매서워도 결국 사람의 온기가 이긴다는 것을, 그 밤의 초소는 오래도록 가르쳐 주었다.
CONTEXT STAMPS
이 이야기의 시절과 장소
THEN &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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